10년 전 나의 이야기 - 9편

어느덧 버스는 내가 사는 동네로 들어서는 길목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너 집 근처 마트에 앞 정류장에서 버스 벨을 누르고 내렸다. 마트 방향으로 향해 걸어가니,. 마트 앞 주차장은 장을 보러 온 차들이 빼곡하게 넘쳐나고 있었다.
매장 안으로 장바구니를 하나 챙겨 들었다. 언제나처럼 매일 반복되는 오랜 습관처럼, 가장 먼저 매대 구석구석을 돌며 오늘 할인 물건이 있는지 확인부터 하는 것이 어느새 내 몸에 밴 당연한 일상이었다.
오늘 저녁 먹거리로 뭘 사야 할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무엇이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매장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유독 고기 종류의 반찬들을 좋아했다.
'햄을 좀 사야겠다.'
계란을 부드럽게 풀어 햄을 노릇하게 구워주면 아이들이 참 잘 먹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곧장 햄이 진열된 매대 앞으로 가서 가격을 빠르게 흩어보았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 안에서 가성비가 좋은 제품을 택하는 일은 늘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좋은 직장을 다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제품 뒤쪽에 적힌 식품유형과 영양 정보까지 꼼꼼하고 철저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에 드는 햄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문득 핸드폰 시계를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둘러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살 물건을 빠르게 챙겨 담은 뒤 마트 계산대로 가 카드로 결제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 지나왔던 역 방향을 지나, 아파트 뒤쪽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와 마침내 집으로 들어왔다.

우선 갑갑했던 외출복을 벗어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 당장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우선 내 뱃속부터 간단하게나마 채워야 저녁 준비든 뭐든 힘을 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돈 몇 푼이 뭐길래, 밖에서 뭐라도 사 먹으면 좋으련만 나는 왜 이렇게 궁상맞게 사는지 모르겠다' 하는 씁쓸한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스쳤다.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당장 입에 넣을 만한 마땅한 음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달걀 몇 개를 꺼냈다. 작은 냄비에 물을 받아 계란을 넣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뒤 불을 켰다. 물이 끓는 동안 거실 소파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늘 남은 시간 동안 할 일들과 오전에 일련에 일들을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점검해 보았다.
오늘 면접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아주 잘 본 것 같았다. 특히 나랑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던 면접관의 어조나 분위기로 보아, 내 답변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듯 매끄럽게 대화가 통했으니 조만간 분명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들었다.
이제 며칠만 꾹 참고 기다리면 우리의 생활도 지금보다는 훨씬 안정적으로 흘러가겠구나 싶어 절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한편으로는 결과도 나오기 전에 혼자 너무 김칫국부터 한 사발 들이켜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슬그머니 들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내 직감은 이번만큼은 정확하다고 믿었다. 또한 면접관의 뉘앙스가 분명했다.
열린 베란다 창문 너머로 철로를 따라 전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묵직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가 하면 아파트 단지 사이 작은 길목에서는 화물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스피커 소리가 아스라이 번져왔다.
"집에 있는 고장 난~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컴퓨터~ 모니터~ 헌책이나 헌 옷, 불용 거전제품~ 삽니다~"
바로 그때, 가스레인지 위에서 요란하게 물 끊은 소리가 거실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서둘러 가스불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에 옮겨 차가운 수돗물로 열기를 식혔다. 열이 다 식은 달걀을 꺼내 껍데기를 톡톡 까서 벗겨냈다. 그리고 소금을 꺼내 콕 찍어 한 입 크게 깨물어 먹었다.

배가 무척 고팠던 탓인지, 세상 그 어떤 진미보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소박하게 허기진 한 끼를 때우고 나서, 마트에서 장을 봐온 재료들을 부지런히 씻으며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간혹 집을 거치지 않고 학원으로 바로 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나는 거실 식탁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볼펜을 손가락에 꼭 쥐고, 하얀 메모지 위에 아이들에게 전할 말을 한 자 한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아빠 오늘 친구 좀 만나고 올 거야, 저녁은 학원 갔다 와서 먹으면 돼. 전기밥통에 새로 밥 해놓았으니까 그릇에 담아 먹어라.'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로 전하면 가장 좋으련만, 바로 집으로 오지 않는 날이 많으니 이렇게 메모지에 적어 냉장고에 붙여놓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아이들이 나중에 집에 와서도 나에게 따로 전화를 걸지 않을 것이고, 내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어디에 갔는지 굳이 불안해하며 궁금해하지도 않을 터였다.
'반찬은 냉장고에 있고, 찌개는 조심해서 데워 먹으면 돼. 그리고 계란 프라이 해서 먹어도 된다.'
다른 포스트잇을 뜯어 또 한 장 가지런하고 예쁘게 글씨를 적어 나란히 붙였다.
'콩나물무침, 어묵볶음, 햄 구이 해놓았으니까 맛있게 먹고, 다 먹은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두어라. 아빠가 와서 설거지할게.'
마지막 포스트잇에는 오늘 차려놓은 반찬 종류들을 보기 좋게 나란히 꾹꾹 눌러 적어 놓았다.
이제 아이들이 집으로 오면 직접 얼굴을 보며 "학원들 잘 다녀오고, 아빠 오늘 좀 늦을 것 같으니까 냉장고에 붙여놓은 메모지 한 번씩 꼭 읽어봐라" 하고 다정하게 한마디 건네기만 하면 오늘 약속을 위한 준비는 대강 끝이었다.
이렇게 다 해놓고 나는 약속 장소를 정하고 시간에 맞추어 갈 생각에 행복했다. 이 행복한 생각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런 만남이 나에게는 스스로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풀어주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정말이지 참 좋은 날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멋있는 재미있는 그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리움을 조금씩 나에게서 덜어주는 것 같아 (5) | 2026.10.12 |
|---|---|
| 기다리는 시간이 삶이지 않았나 싶었다 (8) | 2026.10.10 |
| 그 이야기야말로 행복이 아닐까 (3) | 2026.10.06 |
| 아마, 최종 합격이라고 (7) | 2026.10.04 |
| 그 시절을 찾으러 가는 길 (5) | 2026.10.02 |
댓글